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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돕는 심리 용어들

오늘도 아닌 사람과의 관계에서 애쓰고 있는 당신에게

 

다른 것은 잘 모르겠고, 우리가 우리의 집을 사수해야 해. 

 

 

만약에 져서 우리한테 불이익이 왔을 때, 후회해 봐야 소용없어. 

 

 

 

<피의 게임>에서 장동민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말이 인상적이게 들렸던 이유는 그동안 상담해 오면서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삶을 이용당하고 있으면서 그런지도 모르고 애쓰고 노력하고 있는 분들이 떠올라서였죠. 

 

 

지금 본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으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으세요. 

 

 

지금 당신이 나르시시스트인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있다면, 안쓰러울 뿐이죠. 

 

 

<이혼 숙려 캠프>에 나르시시스트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내가 나옵니다.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말합니다. "나왔어." 하지만 남편을 맞아주는 것은 적막 뿐이었죠.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주방 식탁에 앉아 들어오는 남편을 보고 첫마디를 합니다.

 

아내: 쓰레기 버려.
남편: 어?
아내: 쓰레기 버려.
남편: 어...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가 있는 쪽으로 갑니다.)
아내: 날파리 꼬이잖아.
남편: 어...

 

남편은 군말 없이 아내가 시킨 대로 쓰레기를 들고 밖으로 나갑니다. 남편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죠.

 

 

저희 집에서는 아내가 그냥 왕이에요. 저희 집은 다 아내 눈치를 봐요.

 

그 장면을 보고 모두가 다 술렁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아내인 분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합니다.

 

 


나르시시스트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나르시시스트들은 타인의 노력을 이용하고 믿음을 먹고 자라죠. 그들의  욕심이, 상대에 대한 무시가,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이 함께 있는 사람을 메말라가고 고갈시죠. 

 

 

나르시시스트인 사람을 부모로 두든, 배우자로 두든, 친구로 두든, 연인으로 두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알아줄 거야. 변할 거야.라는 실낱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드리죠. 나르시시스트를 보통의 사람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분이 계셨었습니다. 여든이 넘어 돌아가실 때까지 한결 같이 나르시시스트의 모습이셨던 분이요. 혹시 지금 당신이 상대를 '나르시시스트 정도까지는 아닐 거야'라는 막연한 믿음이나 바람 같은 생각으로 노력과 애씀을 선택하신다면, 안타깝고 안쓰러울 뿐이죠.

 

 


그들에게서 못 벗어나는 사람들, 왜 그럴까요?  

 

제가 그동안 8년 동안 5천여 명의 분들을 상담해오면서 봐온 모습들이 있습니다. 나르시시스트인 사람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관계를 개선하거나 견디려고 하는 것을 선택하는 분들이 그렇게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모습들이요.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나르시시스트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개념이 없으세요. 그래서 그냥 상대가 보여주는 모습을 그냥 좀 욕심이 많아서, 그냥 좀 자기중심적이어서, 그냥 좀 철이 없어서와 같이 감상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으로 스스로 상대와 상황에 대해 물을 타버립니다. 흐지부지하게요. 

 

 

그 이유는 안쓰럽고 안타깝게도 "직면하고 싶지 않아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왜냐하면, 직면하면 이 관계를 끝내야 하는데 그럴 자신도, 그럴 용기도 없는 것입니다. 끝내는 것 뿐만이 아닌, 관계를 끝낸 그 이후가 더 자신이 없고, 용기가 안 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엄두가 안 나기 때문에, 그는 나르시시스트와 같은 자기가 관계를 더 이어가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여야 합니다. 

 

 

그는 그냥 좀 욕심이 많고, 그냥 좀 자기 중심적이며, 그냥 좀 철이 없는 그런 우리 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래서 서로 푸념하면서 다 그렇게 사는 거야라고 합리화할 정도로 취급합니다.

 

 

그렇게 자라오고, 그렇게 성장헤온 결과인 것이죠. 무언가를 못하는 사람이 되어져 있어서, 그래서 무언가를 못하는 사람으로, 무언가를 못한 채 살아갑니다. 속상해하면서 우울해지고, 발고 긍정적으로 살려고 말도 생각도 긍정적으로 흉내도 내면서요. 하지만 대부분 결국 시간문제죠. 효과가 없다는 것을 직면하게 되는 것은요. 

 

 

 

사실 겉보기와 다르게 너무 약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능력도, 스펙도 뛰어난 데에도 불구하고 분별이 아닌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애쓰는 분들이 있습니다. 눈 앞에 주어진 것, 사람들 눈에 보이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는 신경도 많이 쓰고 의식도 많이 하죠. 

 

 

하지만 나를 위한 주체적인 판단과 선택, 그에 따른 결정과 추진에 있어서는 약한 것입니다. 주어진 틀과 판 안에서는 무언가를 막 하지만, 주어진 틀과 판 없는 곳에서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에는 겁도 많고 부담도 큰 것입니다.

 

 

오점 생긱는 것에 대해서도 민감한 모습을 보이시는 경우들도 많으셨고요. '내 삶에 오점을 남길 바에는 죽는 게 나아'라는 식의 생각이 분별보다는 노력을 선택하죠. 왜냐고요? 그런 것을 보고 듣고 접하면서 커왔고, 그렇게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죠. 

 

 

못할 바에는 아예 안 해. 나에 대해 안 좋게 평가하지 못하게 아예 완전히 대충 해버려야지. 이런 식으로 주변 시선과 평가가 내가 느끼는 기분, 감정, 생각, 마음, 존엄보다 더 크게 자리 잡은 삶을 살게 만든 환경에 물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체적이지 못한 약한 자아가 되어 나르시시스트적인 사람들에게 뭔가 증명해 보이듯 살고, 그들의 덫에 안에서 그럴싸한 모양새만 내며 삽니다. 

 

 

우리는 부끄러워할 일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는 것만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해서 불행함도 알아야 합니다. 

 

 

 

이 글을 마무리 지으며 <피의 게임>에 장동민이 했던 또 다른 말을 들려드릴게요. 

 

 

시윤이라는 사람이 함께 했었던 동료가 탈락자 후보가 되자 미안함과 속상함에 울면서 자책을 합니다. '자신이 이렇게 만든 거 같아서 너무 죄송하다'는 것이었죠. 그렇게 흐느끼며 우는 모습을 장동민이 물끄러미 보고 있었습니다. 인터뷰 장면에서 이렇게 장동민이 말하죠. 

 

 

눈물 뚝뚝 흘리기 전에 팀의 승리를 위해 뭔가 좀 더 피눈물을 흘릴 각오로 임했다면 어땠을까

 

 

나중에 자기 자신에게든, 자신의 다른 가족이든,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러워 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직면하면 어떨까요? 오늘도 아닌 사람과 아닌 관계에서 애쓰고 있는 당신에게 이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